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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임시정부

참여작가최진욱 전시기간2009.10.20 ~ 2009.11.15

욕실 문화/정보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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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의 제목을 『임시정부』로 하기로 했다. 임시정부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가 지난 해 광복절을 건국60주년으로 고쳐 부르기로 하면서 (90년 전에 세워진)임시정부는 진행형의 단어로 떠올랐다. 임시정부는 내게 '경계'를 뜻한다. 사회주의자에게도 자유주의자에게도 이것마저 무시하면 안 되는 그 무엇이 여기에 숨 쉬고 있다. 멀리 상하이에 있으면서 모두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아무리 놀고먹는 여행 스케줄에도 한국인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중국 여행 중에 한 30분 둘러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인천공항을 떠나기 전부터 임시정부의 북소리가 가슴을 뛰게 했다. 임시정부가 나의 그림과 닮았다고 얘기하면 지나친 과장이 될 테지만, 은유를 넘어 내 몸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모더니즘과 사실주의가 긴장 관계를 이루어야만 그림이 성공적으로 되는데 그럴 때의 몸의 긴장이 바로 임시정부스럽다.

 

'그림은 신체적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일예로, 사람들이 인상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트리다가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인상파 그림이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에 생긴 짜증나는 얼룩도 캔버스에 들어가면 흐믓한 상상력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의 신체는 수시로 변혁에 직면한다. 일상적인 삶에도 균열이 생기곤 한다. 슬플 때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죽음 앞에 세상이 다르게 느껴진다. 기쁠 때도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들의 잇따른 죽음에 시대적 페이소스를 느끼면서 사람들의 신체는 집단적으로 변하게 된다. 물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변한다. 추상화가 알버스(1888-1976)의 시에 나오는 대로 예전에 예술로 보였던 것이 예술이 아니게 되고, 예술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예술로 보이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만약 이런 신체의 변혁이 화가가 품은 원대한 계획이라면 임시정부의 도시락 폭탄이 담은 원대한 계획과 닮았다고 할 것이다.

 

'그림은 그림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갔지만 한 때 '회화가 끝났다.'는 말이 그림판에 널리 회자되었었다. 사실 현재도 비엔날레 규모의 전시에 가보면 그림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주제를 내거는 전시에서-똑똑한 전시일수록-그림이 초대받기 어려운 일이 된지는 꽤 오래 되었다. 그림이 그림다워질수록 현실을 담아내기 어려워진 것이다. 반면 잘 나가는 그림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미니멀해졌다. 하지만 그림에서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세잔 이후 단절되다시피 했지만,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결합은 더 멀리 가야만 하는데, 그런 그림일수록 예전의 익숙한 그림일 수 없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 너무 스며들어 공산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존폐의 위기를 맞아 중국 땅을 위태로이 헤집고 다녀도 머릿속에서 지워져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림은 그림다워 보일 때가 바로 함정이다.

최진욱_노인과 바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42×194cm_2009

 

「노인과 바다」가 있다. 사실 나의 작업은 「노인과 바다」스럽기도 하다. 사력을 다해 뭔가 건진 것 같은데 육지에 다다르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 바로 바다와 같은 곳이어서. 여기서 노인들은 음란물을 파는 좌판을 주시하고 있는데, 동시에 넘실대는 파도의 죽음 속을 응시하고 있다.

 

「예술은 본다」 갤러리가 있는 건물의 내부는 4개 층이 넓게 트여 한 쪽에 큰 벽면이 있다. (「전봇대2」를 크게 그린 것도 이 넓은 벽면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 가운데 350x370cm 크기 정사각형 창문이 뚫려 있다. 이 창문 위에 사각형 그림으로 유명한 요셉 알버스가 1969년에 쓴 시의 일부를 이용한 문자작업을 걸어둘 작정이다. "예술은 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이 우리를 보니까." 그림을 그릴수록 왜 꼭 그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만약 그림이 나를 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려야할 것 만 같다. 아무도 없는 곳에도 나를 보는 눈이 있는 것만 같은데, 그 걸 표현한다면 얼마나 후련하고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최진욱_떠나가는 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42cm_2009

 

「떠나가는 날」은 햇빛 속의 장례식과 음산한 겨울의 아파트 주차장을 함께 그린 것이다. 원래는 위아래 배치하려고 했는데, 좌우에 배치하기로 했다. 2개의 캔버스가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경우는 흔하지만, 2개의 독립된 장면이 하나의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ㄴ'자의 흰 공간이 생뚱맞으면서도 엄숙함을 전해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결국 떠나고 만다. 사람들은 함께 슬퍼할 때가 제일 위로받는 것 같다. 그래서 시대의 페이소스는 추구할 만 한 것이다.

 

「전봇대1」한 영화의 영화 안 영화 속에서 두 연인의 사랑을 전봇대가 지켜보는데, 사랑은 마침내 전선에 스파크를 일으키며 기적적으로 전달된다. 연인들에게도 결국 소통이 문제다. 지켜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다.

 

「전봇대2」 「전봇대1」의 윗부분을 크게(425×690cm) 그렸다. 전봇대가 관객을 응시하도록 그렸으면 했다. 그러나 하늘과 숲의 비중이 너무 커진 것 같다. 이 그림은 탁 트인 넓은 공간에 깃발처럼 걸리게 된다. 관객이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알버스의 말대로 그림이 관객을 보도록 배치하려고 한다. 「임시정부」가 내 그림에 대한 은유라면 「전봇대」는 전시의 알레고리가 될 것이다.

최진욱_웃음3_캔버스에 유채_41×53cm_2008

 

「웃음3,4」는 작년 전시 이후에 계속 그린 것이다. 누군가 얘기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나이를 모르겠다고. 그런 게 마음에 든다고.

 

최진욱_매화꽃_캔버스에 유채_146×100cm_2009

 

「매화 꽃」 밝은 대낮에 활짝 핀 꽃이 젊은이에게는 폭력적이기만 하다.

 

「24시간 사회」 우리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비정규직을 각오해야 하듯이 24시간 가동되는 시간표 역시 각오해야만 한다. 대낮의 꽃과 실내의 형광등이 다르지 않다.

 

최진욱_수행_캔버스에 유채_80×117cm_2009

 

「수행」 산 속의 절 앞에 '수행중이오니' 관람객은 정숙해 달라는 팻말이 서있는데, 그 옆에 포크레인이 계곡의 돌 들을 파내고 있다. 자고로 수행은 이런 식이다.

 

최진욱_임시정부2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09

 

「임시정부1,2,3,4,5,6」임시정부 유리 문 앞에서 모자가 웃음을 지으며 나오고, 부자가 엄숙하게 사진을 찍고, 현지의 여성들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지나가고, 경비원이 태연히 경비를 서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정신과 몸의 경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여길 떠나면 그냥 놀고먹는 일만 남는다. 짝퉁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형광등 아래 다시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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