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GALLERY ROYAL HOME : Art Gallery : Exhibition

전시명 scale

참여작가허명욱(개인전) 전시기간2011.04.14 ~ 2011.06.07

욕실 문화/정보 게시판
첨부파일

 

 

물론 사물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심지어 산이나 강, 바다나 별 같은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금씩은 변한다. 하물며 고작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들 따위야 말할 필요도 없다. 흐르는 시간은 마치 이끼와 물때처럼 사물에 달라붙어 흔적을 남긴다. 반짝이던 것들은 그 빛을 잃고, 투명한 것들은 탁해지곤 한다. 시간은 사물과 만나 때로는 긁힌 자국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움푹 들어간 흠집이나 부스러지는 페인트 조각이 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살아낸 물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된다. 이는 시간이 변화시키는 것이 단지 사물의 외양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그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매일 닦고 손질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영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때는 금보다 더욱 비쌌다던 알루미늄처럼, 귀금속도 갑자기 잡금속이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사물을 해석하는 우리의 관념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물론 본다는 행위는 일정 부분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보는 행위의 의미는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되어 하나의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그 의미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조각들을 읽어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참고할 만한 수많은 방법론과 문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중 어떤 것들은 인류가 만들어 낸 지적 자산 중 가장 빼어나고 매력적인 작업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론도 움직이는 시공간에 놓인 사물의 의미와 운명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수단는 아니다. 방법론들은 마치 질기지만 성근 그물과 같아서, 큰 물고기는 옭아매더라도 작은 새우나 게, 바닷물 같은 것들은 도무지 포획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사물보다 빠르게 살아가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간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 아름다워지고, 어떤 것들은 추해지는가. 어떤 물건은 시간이 흘러 애틋한 것이 되고, 어떤 것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는가. 왜 대량생산된 일상용품들 중 어떤 것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또 어떤 것은 수집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장인이 만들어낸 ‘작품’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물건을 우리가 소유하거나 버리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허명욱의 카메라는 우리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그런 질문들을 겨누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허명욱이 찍은 것은 트렁크나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가 아니다. 그 위에 슬어 있는 ‘녹’이다. 장난감 자동차와 트렁크에게 시간은 ‘녹’의 형태로 내려앉는다. 시간에 마모된 사물들은 처음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존재가 된다.  허명욱은 오래되고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카메라를 통해 자동차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을 날카롭게 잡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독특하다. 그의 카메라는 사물과,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과 깊게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늙어가듯이, 각각의 사물들은 전부 다른 방식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허명욱은 알고 있다. 그가 찍은 어떤 사물에 슬어 있는 녹은 마치 수풀에 내리는 비처럼 생겼고, 어떤 것은 말라붙고 벗겨진 나무껍질처럼 보인다. 대량생산된 산업생산품이 지니는 기능적인 미학은, 시간과의 화학 반응을 통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허명욱의 작업을 통해 시간을 버텨낸 사물이 새롭게 지니게 된 아름다움과 물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허명욱의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아마도 대상이 너무 작기 때문에 초점이 맞는 범위는 거의 밀리미터 단위로 변화할 것이며, 같은 이유로 특정한 부분을 조명으로 비추거나 빛을 가리는 일도 어려울 것이다. 렌즈가 피사체와 거의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 경통으로 밀려들어오는 난반사를 가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허명욱은 카메라를 사물에 바짝 들이대고, 정밀하게 움직이며 심도와 초점, 빛을 조절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사진에서는 묵직한 아름다움을, 어떤 사진에서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낸다.


이는 그가 물건을 찍는 일로 단련된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제품 사진가의 눈은 일반인 뿐 아니라 다른 사진가의 눈과도 전혀 다르게 진화되어 있다. 그들은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촬영할 때, 그것이 어떻게 놓여야지 아름다운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해내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연필이 지우개에 걸쳐진 것이 아름다운지, 수평으로 놓인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을 바닥에 놓고 지우개를 수직으로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을 지우개에 찔러 넣어서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과 지우개를 교차하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지, 만약 그렇다면 그 각도와 간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순간적인 미적 판단이 가능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필과 지우개가 지닌 특징과 재질을 단번에 파악하고, 두 제품의 반사율 차이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들은 카메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허명욱은 제품 사진가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금속공예 작품이나 반사가 심한 제품을 주로 작업하는 테크니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그것이 허명욱의 눈과 카메라가 우리와는 다른 기관으로 진화한 까닭일 것이다. 탄탄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허명욱의 프레이밍은 정밀하다. 그의 발색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피사체에 떨어지는 빛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아무렇게나 쌓은 것처럼 보이는 장난감 자동차와 트렁크의 형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치밀하다. 특히 허명욱은 능란하고 유연하게 사진의 크기를 다룬다. 그는 72분의 1로 축소되어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다시 72배로 확대하여 실제 자동차의 크기로 만들어 프린트한다. 이 과정에서 장난감 자동차가 지닌 디테일의 감각은 극도로 확대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며, 우리는 사물이 살아 온 시공간을 좀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사실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장난감과 진지하게 씨름하는 프로페셔널의 모습은 어딘가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허명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정밀하게 찍은 사진을 캔버스에 프린트하고, 프린트 위에 부드러운 컬러의 아크릴로 직접 채색한다. 심지어는 직접 쇠막대를 구부려 액자까지 만들어낸다. 허명욱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가들과 달리 사진을 찍고 프린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진 이미지가 완전한 형태의 ‘사물’이 되는 데까지 섬세한 눈과 손으로 개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사진가들보다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나 공예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피사체가 주는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완결된 물성을 지닌 사물이 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루는 그의 기술은 직업적인 버릇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의 눈과 카메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낡은 트렁크는 그냥 낡은 트렁크에 불과했을 것이고, 장난감 자동차는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렇게 묵직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었는지 몰랐을 것이고, 그들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복잡하고 중첩된 구조 안에 있다. 실제 자동차가 가지고 있었을 아름다움은 장난감으로 제작되는 과정과,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여기에서 허명욱의 사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가 느끼는 이 감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원래의 자동차인가? 그렇지 않다면 장난감인가? 혹은 허명욱의 카메라가 새로 만들거나 발견해낸 것인가? 분명한 것은 허명욱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의 흔적과 시간을 추억하며,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미의식은 자생적으로 자라나기보다는 수입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움의 성격이, 과연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부분이다. 허명욱의 작업물은 아름답고 독특하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사진이라는 ‘물건’이 지닌 완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과연 그 아름다움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움이 매우 민감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참으로 복잡한 존재여서, 한편으로는 예술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예술을 공격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어떤 예술들이 아름다움이 버틸 수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만 자생하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진은 전통적으로 대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능을 해 왔다. 예를 들면 제품과 패션 사진을 비롯한 상업사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격정적인 한편, 서늘하고, 관능적이고, 냉정하기도 하다. 프로페셔널 사진가들이 생산한 아름다움은 미디어와 인터넷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둘러싼다. 우리는 주로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이미지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과 관념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둘러싼 사진 속에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우리의 미적 관념을 공격하고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여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한다. 예술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불완전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취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허명욱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이는 우리의 삶이 그의 사진보다 대개 남루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사진을 찍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럽다면 굳이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을 소유하려고 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허명욱의 사진에 매혹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허명욱은 한때는 대량생산된 일상용품에 지나지 않던 사물이 지니게 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작업 안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서사는 복잡하고, 내재된 욕망은 다양하다. 아마도 그는 예술이라는 영역을 지나면서 수많은 질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씩 전진할수록, 우리는 그를 통해 사물의 다양하고 복잡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김현호

 

 

목록으로